생말로(Saint-Malo),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해안 도시. 몽생미셸 여행을 계획하며 근처를 둘러보니 ‘응? 여기 들어본 것 같은데?’ 싶어 여자 친구에게 물어보니 마트에서 본 거 아니냐고 한다. 생말로 이름을 단 제품이 많다고. 얼추 맞는 것 같다. 생말로가 속한 브르타뉴(Bretagne)는 유제품을 많이 생산하는데, 요플레나 우유가 들어간 디저트에 이 이름이 많이 달렸던 것 같다.
이름이 익숙하니 가볼 법하지. 그래서 몽생미셸[링크]과 캉칼(Cancale, 껑꺌)[링크], 디나흐(Dinard), 디넝(Dinan), 몽-돌(Mont-Dol)을 묶어 2박 3일 정도 근교 여행 겸 바람 쐬러 다녀왔다. 여자 친구와 함께 지내던 라니옹(Lannion)[링크]에서 차로 두세 시간 거리.
생말로는 해적의 도시였다. 정확히는 국왕한테 허락받은 사략선(Corsaire, 코르세르)들의 주 무대였다. 허락받고 적국의 배를 약탈하는 것이니 만큼, 국왕한테 이것저것 많이 갖다 바쳤단다. 해적들이 많이 있던 곳이라 그런지 성벽이 도시를 완전 둘러싸고 있다. 공격하는 건 좋아했는데 받는 건 싫어했나 보다.
이곳 앞바다도 몽생미셸만(Baie du Mont-Saint-Michel)에 속해서 조수 간만의 차가 엄청나다. 덕분에 물이 다 빠지면 근처 섬까지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근처 섬은 그랑베(Grand Bé)와 쁘띠베(Petit Bé) 두 곳. Bé는 브르타뉴 방언으로 ‘섬’을 의미하고, 그랑은 ‘큰’, 쁘띠는 ‘작은’을 의미한다. 그랑베는 큰 섬이고, 쁘띠베는 작은 섬. 이름 참 대강 지었다.
1. Saint-Malo 성벽 위 산책
차를 타고 갔으니 주차를 해야 하는데, 당연히 유료다. 꽤 넓은 동네라 주차장이 많을 법도 한데, 그래도 유료다. 프랑스나 유럽에서는 나름 유명한 관광지인지, 차가 끊임없이 오가긴 하더라. 우린 적당히 성곽 외곽 어딘가 쯤 야외 유료 주차장에 주차했다. 대강 시간당 2유로 안 됐던 걸로 기억한다. 땅덩이도 넓으면서 관광객들에게 주차비는 엄청 뜯어간다.
주차하고 성 안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본 모습부터 딱 중세 시대 성 느낌인데, 골목으로 들어서니까 건물들도 죄다 중세 건물이다. 파리처럼 예쁜 중세 건물 느낌은 아니고, 좀 더 투박하다. 라니옹(Lannion)이나 페로스-기렉(Perros-Guirrec)에서 본 브르타뉴 특유의 돌건물 느낌도 아니다. 해적들이 돈이 많으니 신경 써서 짓긴 했는데, 수도인 파리를 따라가지는 못한 뭐 그런 느낌?
시가지가 메인은 아니니 바로 성벽을 향해 갔다.

온화한 기후 덕에 산책이나 관광 온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성벽 위는 걷기에도 부대낄 정도로 사람이 꽤 많았다. 사계절 내내 온화해서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에도 선선하고. 지역빨 환경이 좋다. 한국이 이런 기후였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해변을 내려다 보니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해변의 이름은 Plage de Bon-Secours, 조수 간만의 차를 이용해 만든 천연 바닷물 야외 수영장과 그 끝에 있는 5m 높이의 다이빙대가 랜드마크이다.
오전 시간대라 날이 덜 따뜻했는지 바닷물을 가둬 만든 야외 수영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위에 말했듯 기후가 온화한 곳이지만, 해가 이렇게 쨍하게 내리쬐는 맑은 날은 귀한 편이라 더 많은 사람들이 광합성하러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저 멀리 그랑베(Grand Bé)와 쁘띠베(Petit Bé)가 보인다. 앞서 설명한 대로 ‘큰 섬’과 ‘작은 섬’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게 그랑베, 왼쪽에 보이는 사각형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서 있는 섬이 쁘띠베다. 이날 딱히 시간을 맞춰 온 건 아닌데, 바닷길이 열려 있다. 두 섬에 관한 이야기는 잠시 뒤에 하는 걸로.

좀 더 가까이 가서 보니 길 양 옆으로 바닷물이 차 있다. 중간에 돌길이 있는데, 잠긴 모습도 한번 보고 싶더라. 어디까지 물이 차 오를까?
멀리 쁘띠베로 가는 길을 보면 몇 명의 사람들이 걸어 들어가려고 준비 중인 것 같다. 그랑베로 가는 길보다 훨씬 협소한 작은 길인데, 저곳은 정말 타이밍이 좋지 않으면 발걸음하기 쉽지 않을 것 같이 생겼다.

날씨가 좋아 반대편 디나흐(Dinard) 해안가에 있는 요트 정박지 Mouillage de Dinard까지 보인다. 부자들이 많이 놀러가는 리조트 휴양지인가 보다.

성벽 산책을 마치고 해변으로 내려가 보았다. 사진에 보이는 건 단순한 성벽이 아니다.
12세기쯤에 해적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세웠고,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국가 공인 해적(Corsairs)이 이곳을 거점으로 삼으며 방어용으로 더 공고히 했다고 한다. 이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동안은 영국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해안 방어 요새인 쁘띠베와 그랑베가 건설되었다고.
이후 제2차 세계대전 때 이곳을 점령한 독일군을 향해 연합군과 미군이 폭격을 날린 덕에 도시의 80%가 파괴되었었는데, 성벽은 멀쩡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전설 같은 이야기.
2. Plage de Bon-Secours의 야외 수영장과 다이빙대
해변 이름은 Plage de Bon-Secours[링크], 그곳에 있는 천연 바닷물 야외 수영장의 이름은 Piscine d’eau de mer de la plage Bon-Secours이다. Piscine은 수영장, d’eau de mer는 해수, 즉 바닷물, 그 뒤로는 해변 이름을 붙여, 그냥 바닷물 수영장이라는 뜻이다. 불어로 구구절절 써놓으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하다.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에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열정적인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이빙대에 올라 있다. 저 열정의 반의반만이라도 내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실루엣만 보면 아이들 같긴 하다. 저렇게 작게 보여도 저 다이빙대의 높이가 5m다. 다이빙대 아래의 수심은 약 3~4m쯤 된다 하니, 머리가 깨질 일은 없을 듯하다.

출발(Takeoff) 8점, 비행(Flight) 9.5점, 자세(Form) 8.5점, 회전화 반전(Rotation & Twists) 6점, 입수(Entry) 9점, 담력, 담력은… 10점.. 10점이요!!
3. 그랑베(Grand Bé)와 쁘띠베(Petit Bé)

이제 그랑베로 향한다. 좌우는 뻘밭이고, 중앙에 돌길이 있다. 썰물 때만 걸어서 접근 가능한, 선택받은 자만이 갈 수 있는 땅, 은 오바고, 꽤 오랜 시간 길이 열려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성벽 다 둘러보고 널널하게 건너갔다. 물이 찰 때쯤부터는 통제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주의의 나라이자 수영이 국민 운동인 나라라 알아서 나오라고 그냥 두려나?
아무튼, 이 그랑베는 17세기부터 방어 요충지로 쓰였고, 18세기에 영국이 침략할 걸 대비해 요새화했다 한다. 저 언덕 위에는 프랑스 작가인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의 묘지가 위치해 있다. 아탈라, 르네, 기독교 정신론, 무덤 너머의 회상록, 뭐 이런 대표작을 썼다고 한다. 난 잘 모른다. 내가 아는 샤토브리앙은 안심 스테이크뿐이다.
참고하라고 생말로 조수 시간표 링크를 남긴다. 우리처럼 운이 좋지 않을 수 있으니, 미리 확인해 보고 방문하기 바란다. 근데 물에 차서 섬의 모습으로 둥둥 떠 있는 그랑베와 쁘띠베의 모습도 그것대로 운치 있을 것 같다.


그랑베에 올라 생말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뚫기 어렵게 생겼다. 물이 빠져서 이 정도지, 밀물 때는 성벽 가까이에 배를 대야 할 텐데, 이순신 장군도 울고 갈 것 같다.
자연도 잘 보존돼 있어 그랑베로 오는 길 양쪽의 뻘에 홍합, 따개비 등이 꽤 보였다. 조개를 채집하는 가족들도 은근 보였다. 근데 프랑스에서 홍합은 꽤 고급 식재료로 분류되는 듯하던데, 거들떠보지도 않더라. 생활력이 그리 강한 민족은 아닌 듯.

쁘띠베에는 못 갔다. 현재 일부 복원되어 투어가 가능하기는 하다고 한다.
이 작은 섬은 역시 17세기에 설계하고 지은 군사 요새다. 바반(Vauban)이란 사람이 다 했단다. 저 작은 섬에 큰 덩치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세워져 있다. 전쟁은 저렇게나 무서운 것이다.
3. 해리포터 기념품샵, 그리고 식사
중세 요새 도시라는 점이 마법 세계와 어울려서일까, Mystère & Cie[링크]라는 기념품샵에서 다양한 해리포터 기념품을 판매한다.

J.K. 롤링이 어린 시절 생말로에서 휴가를 보내며 영감을 얻었다는 썰이 있다는데, 이게 말인가 당나귄가 싶다. 어떻게든 연관 짓고 싶었나 보다. 이 기념품샵이 해리포터와 관련된 굿즈만 파는 건 아니지만, 비중이 상당히 높다. 뜬금없어서 들어가서 구경했다. 해적의 도시니까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 굿즈를 가져다 놓았으면 더 어울리지 않았을까?

생말로 내에서 식사했는데, 식당의 이름과 셰프가 바뀐 모양이다. 현재의 이름은 L’Armateur[링크]인데, 리뷰 77개에 평점이 5.0점이다. 인당 30~40유로 정도 하는 프랑스 레스토랑. 우린 전식1, 본식2, 디저트1, 음료1 주문했던 듯하다.
푸아그라는 파리에서 먹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았다. 여자 친구는 대구로 추정되는 흰 살 생선 요리를, 나는 역시나 고기를 썰었다. 디저트는 솔티드 캐러멜에 찍어 크림을 올려 먹는 빵 같은 무언가.
4. 마치며,
이날은 날이 좋아서 모든 게 평온했는데, 바람이 거센 날에는 파도가 생말로 성벽에 부딪혀 도시 안으로 들어올 정도다. 그것도 운치 있겠다 싶긴 한데, 위험하다. 타지에서 아프면 병원 가기도 힘들다. 쯔쯔가무시에 물려 고생 좀 해 본 경험담이다. 아 물론, 생말로에서 물린 건 아니다.
몽생미셸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하기엔 관광객이 너무 많은 작은 해안 마을이다. 이미 우리들을 제외한 세계인들에게는 유명한 곳일지도… 해적의 도시라 해서 중세 시대에 만든 배들도 전시돼 있고, 난파선도 좀 있을 줄 알았는데, 영화를 너무 많이 봤나 보다.
그래도 제2차 세계대전을 굳건히 버텨낸 성벽과, 선택된 자만 갈 수 있는 그랑베와 쁘띠베, 자연 해수 수영장의 다이빙대는 내 심금을 울렸다. 좋은 곳이다. 갈 일이 있다면 한번 꼭 가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