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르그헝드(Île Grande), 브르타뉴 섬 여행에서 만난 것들

라니옹(Lannion)[링크]에 반년 정도 살면서 여러 번 놀러 가 본 섬 일르그헝드(Île Grande), 페로스-기렉(Perros-Guirrec)[링크] 같은 대표적인 휴양지는 아니지만, 훨씬 더 즐거운 기억이 많은 곳이다.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조개잡이를 했었기 때문인 것도 있고, 온 브르타뉴 지방을 연결하는 GR34 트레킹 코스에 포함된 길이 너무나도 예뻤던 것도 한몫 했다.

사실 라니옹과 페로스-기렉과 차로 몇 십 분 거리에 위치한 곳이라, 하루 중 반나절 정도만 투자해도 이 근처의 모든 동네를 돌아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여자 친구와 나는 휴일의 늦은 오후나, 바닷바람을 잠깐 쐬고 싶을 때, 쌩 하고 달려가 기분 내고 돌아오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여유로움이 넘쳐났던 섬, 재미있는 해안 생태계를 가진 섬, 자연미가 특출났던 섬, 일르그헝드를 여행하며 보고 듣고 했던 것들을 써 볼까 한다.

1. 일르그헝드(Île Grande)의 첫인상

주요 관광지는 아니기에 널널한 무료 주차장이 많다. 우리가 주차한 곳은, GR34 해안 트레킹 코스와 멀지 않은, 그렇지만 바다가 바로 보이지는 않는 곳에 위치한 캠핑장 겸 주차장이었다. 정확하게 캠핑장 용도는 아닌 거 같은데, 일반 승용차들보다 캠핑카가 훨씬 많았다.

A fairy-tale-like flower path lined with blooming white blossoms.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하얀 꽃이 만개한 길
Fairy-tale flower path | 동화같은 꽃길

해안가로 가려면 풀숲을 한참 걸어가야 하는데, 가는 길목 중간 화사한 꽃길이 반겨준다. 소박한 환영 인사지만 기분이 좋다. 키가 2m는 되는지, 꽃길 너머로는 키 큰 나무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 붐비는 여행지는 아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아예 없진 않다. 간혹 마실 나온 가족들과 마주친다. 트레킹 복장을 한 사람들도 있다. 관광보단 조용한 휴식을 원하는 사람들, 자연에 자연스레 녹아들고 싶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듯하다. 

Ile Grande travel walking along the coastal trail under tall trees 일르그헝드여행 큰 나무 아래 해안 산책로를 걷는 모습
Coastal Trail under Shady Trees 그늘진 나무 아래 해안 산책로

바닷가가 보인다. 햇살이 따가울 것 같아 보이지만, 적당한 온도의 날이었다. 바다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섬이지만, 바닷바람이 세지 않아 한결 아늑한 느낌이 든다. 의도적으로 닦아 놓은 인위적인 길 위, 사람들의 북적임보다는 새소리가 먼저 귀에 꽂 힌다. 멀리서 들리는 파도 소리가 아른거린다. 여유로운 시공간 속, 저절로 힐링 되는 기분이다.

2. 해안 꽃길과 오래된 나무

일르그헝드의 모든 해안선 도보 코스는 2,000km에 달하는 GR34 트레킹 코스에 포함된다. GR은 Grande Randonnée, 장거리 하이킹 루트를 뜻하고, 34는 34번째 루트라는 뜻이다. 이 GR34는 불어로 Sentier des Douaniers(세관원의 길) 혹은 Sentier du Littoral Breton(브르타뉴 해안 트레일)이라고도 불리고, 영어로는 Brittany Coast Path(브르타뉴 해안길)라 불린다.

GR34에 관심이 생겼다면, 아래 공식 페이지들을 참고해 보자. GR34 공식 웹사이트와 브르타뉴 관광 공식 사이트의 GR34 페이지 링크다.

Ile Grande travel resting under an ancient twisting tree 일르그헝드여행 구불구불 굵은 가지를 뻗은 오래된 나무 아래에서 쉬는 모습
Resting Beneath an Ancient Tree 오래된 나무 그늘에 앉아 쉬기

섬에서 만난 오래된 나무. 기둥이 휘어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잠시 쉴 수 있는 그늘을 선사해 준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생각난다. 솔솔 부는 바닷바람과 해를 막아주는 나무 덕에 상쾌하고 쾌적하다. 길도 대부분 평지라 산책하기 안성맞춤이다.

일르그헝드는, 브르타뉴 지방 대부분이 그렇지만, 온화한 기후를 자랑한다. 겨울을 제외하고는 일조량도 풍부한 편이다. (겨울에는 영국처럼 대부분의 날이 흐리고, 걸핏하면 비나 우박이 쏟아진다. 그러다가 만화처럼 쨍하고 해가 떴다가, 다시 돌풍이 불고 우박이 쏟아진다) 덕분에 식물들이 건강하게 잘 자란다. 딱히 관리된 곳이 아님에도, 빛깔들이 너무나 좋다.

Ile Grande travel half flowers half sea with bright sky 일르그헝드여행 꽃과 바다, 하늘이 어우러진 장면
Blossoms Meeting the Sea 꽃과 바다가 조우하는 순간

해안가로 나오는 길에 봤던 그 하얀 꽃이 바닷가에도 피어 있다. 블랙손(Blackthorn, Prunus spinosa)이 아닐까 싶다. 꽃 아래로는 얕고 푸른 바다가, 그 너머로는 대륙이 보인다. 바다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나 찾아보니, 군데군데 작은 오솔길이 나 있다. 이미 아이들이 모래사장에서 흙장난 중이다. 얼른 내려가 본다.

Ile Grande travel shallow sea wave gently rolling 일르그헝드여행 잔잔하게 밀려드는 얕은 파도의 움짤
Gentle Shallow Waves 잔잔한 얕은 파도의 움직임

수심이 진짜 얕다. 물도 깨끗하고 잔잔해서 바닥이 비친다. 발을 담그면 정강이 정도밖에 오지 않는다. 이대로 바다 건너 대륙까지 걸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상상만 하고 실행하진 않았다.

A scenic view of the sea during low tide, revealing a sandy shore with small sand formations. 물이 빠지며 드러난 모래 해변과 작은 모래 언덕들이 만들어낸 풍경
Receding tide sea | 물이 빠지고 있는 바다

브르타뉴의 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매우 크다. 가장 큰 바다는 높이차가 15m에 달한다고 한다. 이건 몽생미셸(Mont Saint-Michel)[링크] 여행기와 캉칼(Cancale)[링크] 여행기에서도 다루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일르그헝드도 예외가 아니다. 얕고 넓었던 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간다. 저 멀리 미처 다 빠져나가지 못한 바닷물이 살짝 보인다. 물이 빠져나가자마자 모래뻘 속으로 숨어들어간 생명체들의 흔적이 징그럽게 많이 생겨났다. 바다지렁이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Ile Grande travel horse galloping on the tidal flats at low tide 일르그헝드여행 썰물 때 뻘 위를 질주하는 말
A Horse Gallops on Low Tide Sands 썰물이 드러난 뻘 위를 달리는 말

그 갯벌 위를 뭔가 뛴다. 저게 뭐이고? 하도 작게 보여서 카메라 줌을 이빠이 땡겨 보았다. 말을 탄 사람이다. 뜬금없지만 멋지다. 한국 서해안의 갯벌처럼 푹푹 빠지는 뻘은 아닌가 보다.

running_horse_playing_kids_달리는_말과_뛰는_아이들

뛰는 말을 발견한 아이들이 모래놀이하다 말고 따라 뛴다. 나도 달려가서 태워달라 할까 하다가 참았다.

3. 배말, 조개 채집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모래사장에 박혀 있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돌들에 수많은 배말이 붙어 있는 걸 봤다. 그리고 차를 타고 섬으로 오는 다리를 건너던 중에 모래를 빨아들이는 기계로 조개를 채집하는 어업 종사자들을 봤다. 동해에서도 서해에서도 갖가지 조개를 잡아 본 경험을 토대로 계산해 보니, ‘배말 조개 손수제비’라는 메뉴가 나왔다.

Limpets clinging to rocks on a sandy beach, exposed during low tide. 물이 빠진 해변에서 바위에 단단히 붙어 있는 배말들
Limpets on rocks | 바위에 붙어 있는 배말들

얼마 후 프랑스의 다이소 Action에서 삽과 갖가지 공구들을 챙겨 재방문했다. 근데 같은 시간에 방문했는데 물이 차 있네…? 고2, 고3 때 지구과학 1, 2를 선택하지 않아서일까, 밀물 썰물 시간이 매일 달라진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이때 한번 데여서 그 뒤로는 한국에서도 꼭 최대 간조 시간에 맞춰 잘 방문하고 있다. 한번 쓴맛을 봐야 기억에 오래 남는다.

A collection of clams and limpets gathered from Île-Grande, soaking in water to remove sand. 일르그헝드에서 채취한 조개와 배말을 해감하기 위해 물에 담근 모습

위와 아래 사진은 일르그헝드에서 다른 날, 살짝 다른 지점에서 잡은 조개와 배말이다.

먼저 배말은, 유럽 배말(Patella vulgata) 또는 Patella depressa라고 불리는 종자란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조리해 먹는단다.

조개는 잘못 먹으면 세상 하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전문가한테 물어봤었다.

A screenshot of a Naver Knowledge iN post discussing the identification and edibility of Clinocardium buelowi, a type of cockle. 네이버 지식인에서 굽은이랑새조개(Clinocardium buelowi)의 식용 가능 여부에 대한 답변을 담은 스크린샷
Naver Knowledge iN says | 네이버 지식인 가라사대

모시조개처럼 생긴 게 대복이라는 것 같고, 꼬막처럼 생긴 게 굵은이랑새조개라는 답변이 달렸다.

‘살짝 데쳐서 먹는 중인데 식용으로 가능한가요?’라는 질문을 더 한 걸 보니, 목숨 걸고 먹고 있었나 보다. 꼬막하고 비슷하게 생겼길래 삶아서 간장 양념해 무쳐 먹었는데, 꼬막처럼 알이 꽉 차지도 않았고, 씹었을 때의 식감도 꼬막 같은 느낌이 아니라 뭐가 탱탱 터지더라. 아무튼 살아 있다는 게 중요.

A pot of homemade sujebi (Korean hand-torn dough soup) with shellfish, including limpets and clams, simmering in a flavorful broth. 손으로 뜯은 수제비에 배말과 조개를 더해 깊은 맛을 낸 국물 요리
Handmade sujebi, now with limpets and clams | 손수제비, 근데 이제 배말과 조개를 곁들인

배말과 대복은 손수제비에 들어갔다. 밀가루 사서 직접 반죽해서 몇 시간 숙성시켜 수제비를 떴다. 첫 손수제비를 프랑스에서 떴다.

한국에서 가져갔던 네모난 모양의 건조 해산물 육수 블록과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꼬만 간장(한국 간장은 없었음) 등을 넣어 육수를 냈다.

배말 손질 쉽지 않더라… 특히 그 생김새가… 항상 전복 및 해산물을 손수 손질해 요리해 주시는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이 새삼스레 밀려왔다. 요새 손질되어 나오는 해산물들이 많은데, 돈 많이 벌어서 내가 직접 손질할 일 없는 애들만 갖다 먹으리라.

아무튼, 나름 괜찮은 식사였다.

4. 일르그헝드에서 마주한 마성의 갈레트

일르그헝드에서 식사한 적이 한 번 있다. 외식비가 너무 세서 어지간하면 사 먹는 일이 잘 없는데, 날이 너무 좋아서, 모든 것이 너무 좋아서, 큰 결심 했다. 저녁 먹기에는 이른 오후라 간단히 먹기로 했다. 메뉴는 브르타뉴 전통 음식 갈레트(Galette). (발음이 갈레트보다는 ‘걀레뜨’에 가깝긴 하지만, 보기 쉽게 갈레트로 통일하겠다)

아마 크레프(Crêpe)는 들어봤을 거 같다. 한국 길거리에서 많이 파는 음식이니. 갈레트는 크레프와 사촌쯤 되는 음식이다. 갈레트 브르통(Galette Bretonne), 크레프 브르통(Crêpe Bretonne) 모두 브르타뉴 전통 음식인데, 크레프는 밀가루 사용해서 디저트로 만든 거고, 갈레트는 메밀가루(Blé noir, Sarrasin)를 사용해서 요리로 만든 음식이다. 밀가루가 들어가지 않아 글루텐이 없다.

우리가 찾아 들어간 식당은 Les Triagoz[링크], 구글 지도 기준 리뷰 1,218개에 4.5점짜리 ‘크레프리’이다. 갈레트는 3~10유로 정도, 크레프는 2~8유로 정도 했다.

여자 친구네 회사에서 가끔 나오는 브르타뉴 토종 소시지가 있는데, 맛과 향이 역해서 어지간한 건 다 먹는 자기조차 반도 못 먹겠더란다. 엉두이 드 게므네(Andouille de Guémené), 그 소시지 이름이다. 메뉴판에서 이 이름이 보였다. 그래서 시켰다.

A traditional Breton galette topped with a fried egg and a slice of Andouille de Guémené, served with a glass of cider. 프랑스 브르타뉴식 갈레트에 계란 프라이와 악명 높은 안두이 드 게메네 소시지를 곁들여 시드르와 함께 제공된 모습
Galette with the infamous sausage and a refreshing cider | 악명높은 소시지가 들어간 갈레트와 입가심용 Cidre

 

여자 친구는 안전빵으로 햄(Jambon), 계란(oeuf), 에멘탈 치즈가 들어간 기본 갈레트를 주문했고, 갈레트와 궁합이 좋은 Cidre도 한잔 주문했다. 영어로는 Cider(사이다), 불어로는 Cidre(시드르), 대강 도수 낮은 사과주라 보면 된다.

엉두이 드 게므네(Andouille de Guémené, 혹은 안두이 드 게메네)의 맛이 궁금하다면 한번 직접 먹어보기 바란다. 글로벌 시대인만큼 네*버나 쿠*에 팔까 싶어 검색해 봤는데, 없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맛이 난다. 사진 상에는 하나 나온 것 같지만, 위에 드러난 것 포함 총 다섯 덩어리가 들어가 있다. 삼각형 꼭짓점에 한 개씩, 센터에 한 개, 드러난 것 한 개, 3+1+1. 하나만 맛 봤으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인심이 후하다.

리옹(Lyon)[링크]에서 먹었던 Tablier de sapeur(타블리에 드 사푀르)를 뛰어넘는 역함이다. (타블리에 드 사푀르는 소의 첫 번째 위장인 瘤胃(양, Rumen)으로 만든 돈까스 같은 요리다) 유럽에서 외식할 땐 어지간히 맛 없어도 돈이 아까워서 꾸역꾸역 먹는 편인데, 이 소시지는 다섯 개 중에 두 개도 다 못 먹었다.

맛 설명에 열을 올리느라 재료 설명을 이제서야 한다. 엉두이 드 게므네는 돼지의 소장(小腸)과 대장(大腸)을 주로 사용하고, 돼지 식도까지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소시지처럼 다져서 넣는 게 아니다. 내장을 통째료 둘둘 말아 만든다. 그래서 사진처럼 층이 있다. 이 소시지를 참나무(Chêne) 연기로 2~3주 천천히 훈제해서 향을 넣는다. 이후 맛을 응축시키려면 수개월의 건조 숙성을 더 한단다.

모란시장에 돼지부속 유명한 집, 가 보지는 않았는데, 그 돼지부속들이 익숙하다면 먹을만할 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아니다.

오랜만에 괜찮지 못한 식사였다.

5. 마치며,

Ile Grande travel rocky vantage point overlooking the wide ocean 일르그헝드여행 거친 바위 위에서 바라본 망망대해
Standing on the Rocks for an Ocean View 바위 위에서 바다를 조망하기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바다라 해서 갯벌과 모래사장만 있는 건 아니다. 브르타뉴의 자랑 화강암 지대도 많다. Perros-Guirrec(페로스-기렉)[링크]의 핑크색 화강암은 아니지만, 큐브 모양으로 썩둑썩둑 잘려 우둘투둘 튀어나와 있는 돌들의 모습이 웅장해 보인다.

아무튼, 일르그헝드에서 생긴 추억이 많다. 어릴 때나 해 보았던 조개 채집도 해 보고, 덕분에 직접 손 수제비도 떠 보았다. 처음 맛보는 소시지가 들어간 전통 갈레트와, 달달 상큼한 시드르 한 잔도 이곳에서 처음 경험했다.

엄청난 관광지는 아니지만, 쨍하게 해 뜬 날 그곳을 걷던 생각이 가끔 난다. 그 정도 추억이면 족한 게 여행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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