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샤모니(Chamonix)로 가는 길
리옹(Lyon, 이전 글)은 거쳐가는, 찍먹하는 도시였다면, 샤모니 몽블랑(Chamonix-Mont-Blanc)은 설렘과 기대로 가득찬 우리 여정의 진정한 출발점이다. 산 정상에 자리 잡은 우리 숙소. 구불구불 이어진 대관령 같은 길을 따라 내려간다. 드디어 평지가 나왔다. 주유를 마치고 출발하려는 찰나, 햇빛에 반짝이는 수면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마치 거울처럼 반짝이는 호숫가다.

숨은 보석 같은 작은 호수다. Lac de Nantua, 낭튀아 호. 깨끗하게 다듬어진 호수 바닥이 눈에 들어온다. 인공호수라 생각했지만, 자연이 빚어낸 빙하호라고 한다. 면적 1.41제곱킬로미터에 최대 깊이는 42m,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로운 호수였다.
물결 위를 노니는 사랑스러운 오리 무리가 눈에 띈다. 관광객의 손길에 익숙한지 사람을 따르는 게 자연스럽다. 손짓 한 번에 물살을 가르며 재잘거리듯 몰려온다. 빈손이라 미안하구나.

초록빛 산들 너머로 하얀 거인이 솟아있다. 가을의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설산, 유럽 알프스의 최고봉인 몽블랑(Mont-Blanc)이 모습을 드러낸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외딴 산꼭대기에 우리 숙소가 있다. 주변엔 대형마트가 없어, 가는 길의 앙떼르마셰 수퍼(Intermarché Super)에서 며칠 치 식량을 준비했다. 지방에서만 볼 수 있었던 내 최애 마트 중 하나인 앙떼르마셰가 슬슬 파리 변두리에도 생기고 있다. [프랑스 마트 비교 리뷰글]도 곧 찾아올 예정이다.
2. 가성비와 뷰가 지리는 숙소 RUBIS
리옹과 샤모니 사이 150km, 2시간 30분의 여정 끝에 도착한 우리 집. 하늘 가까이 자리 잡은 이곳은 믿기 힘든 가격과 숨 막히는 전망을 품고 있다. 이름하여 Paradis vue splendide Mont Blanc[Airbnb 링크].
구글 지도[링크]에서 보면 RUBIS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앞으로 숙소를 RUBIS로 통일하여 글을 쓰려 한다. 정확히는 Dacotalocs – RUBIS라고 돼 있는데, ‘Dacotalocs’는 이 Rubis를 관리하는 회사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 산장 바로 아래쪽에 Residence Opale도 있고 Residence Cristal도 있다. 똑같이 생긴 건물인데, 묵는 숙소에 따라 뷰는 천차만별일 것 같다.
우리가 묵은 RUBIS의 방 한 칸은 4박 5일에 고작 180달러. 하루 45달러 수준이다. 샤모니 마을의 숙소들과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미친 가성비의 숙소. 세금 제외하면 하루 20유로 후반대였다. 하지만 이런 가격엔 그만한 이유가 숨어있다. 그 전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자.

침대에 누워 바라보는 몽블랑 산맥. 테라스로 나서면 훨씬 더 장엄한 모습이 펼쳐진다. 집 주인이 에어비앤비에 올린 사진을 보며 어떤 느낌일지 상상만 했었는데, 직접 보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있다. 계절만 맞았다면 숙소의 수영장도 즐겼을 텐데, 쌀쌀한 날씨에 문을 닫았다. 온수 수영장이라는데 7월 1일부터 9월 1일까지만 운영한단다.
자, 이제 숨겨진 제약들을 하나씩 풀어보자.
첫째로, 숙소 주인은 프랑스어의 세계에만 산다. 불어 구사자만 엄선해서 받는다. 첫 예약 시도는 누가 봐도 불어 못하게 생긴 아시안이 에어비앤비 프로필 사진으로 등록되어 있어 실패했다. 하지만, 원어민급 불어를 구사하는 여자친구와 대화를 나눈 뒤, 바로 예약이 수락 되었다. 첫 번째 관문 통과.
둘째로, 기본적인 침구류와 생활용품이 제공되지 않는다. 이불, 침대 시트, 수건, 휴지까지 모두 손님 몫이다. 다행히 우리는 리옹편에서 언급했듯 짐 속에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이 숙소를 위해 일부러 팔지 않고 가져왔다. 이후 여정에서도 요긴하게 쓰였다. 두 번째 관문도 통과.
셋째로, 자동차는 필수다. 구불구불 산길 끝에 자리 잡은 외딴 산장이다. 우리의 작은 영웅, 1000cc 도요타 Aygo가 성인 둘과 100kg의 짐을 싣고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4박 5일 내내.
마지막으로, 이건 제약이라기보단 약속. 다음 손님을 위해 직접 청소를 해야 한다. 사용한 모든 공간을 깨끗이 정리하고, 물품 개수까지 꼼꼼히 체크하여 표에 기입해야 한다. 외딴 곳의 특성상 주인이 매번 오기 힘들어 이런 신뢰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 같다.
평범한 외국인 여행자라면 이런 숙소를 경험하기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져 특별한 기회를 잡았다. 덕분에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우주가 선물한 최고의 타임랩스를 담아낼 수 있었다.

밤새도록 고프로로 녹화했다. 배터리 한두 개로는 연속 촬영을 할 수가 없어서 직접 충전기를 꽂았다. 다행히도 테라스에 전기 콘센트가 있더라.
구름 한 점 없는 창공이 선사한 기적 같은 광경. 어스름한 샤모니 몽블랑 위로 별들이 춤추듯 회전하며 솟구치고, 휘황찬란한 달빛은 만년설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황홀경은 곧 유튜브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새벽녘, 알람 소리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찬 공기를 가르며 테라스로 나가 고프로의 설정을 바꾸고 다시 포근한 이불 속으로.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이 영상이다. 이날은 숙소에서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라, 태양이 하늘 한가운데 자리 잡을 때까지 카메라가 돌아갔다.
3. 몽블랑을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한 하이킹
간단한 점심으로 허기를 달래고 하이킹을 나섰다. 우리 산장 한켠에는 스키 보관소가 있다. 겨울이면 스키어들의 천국이 되는 이곳이, 여름이면 하이커들의 놀이터로 변신한다.
수많은 하이킹 코스가 있지만, 평소 산행을 하지 않는 우리의 체력을 위해 적당한 코스로 잡는다. 겨울이었다면 스키 슬로프가 있었을 곳이다. 숙소에서 하이킹 시작점까지 멀지는 않지만, 가깝지도 않다. 주차 시설이 잘 되어 있어 차를 타고 갔는데, 걸어왔으면 큰일 날뻔했다.

나약한 우리와 달리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질주하는 사람이 있다. 한둘이 아니다. 정상에 도달하기까지, 그리고 정상에 도달해서도 MTB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하나 둘 스쳐지나갔다. 진심으로 대단하다 싶다.
코스 중간중간 동물들이 있다. 양떼와 소떼를 지나 얼음을 핥는 당나귀를 마주쳤다. 사람이 지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쪽쪽 핥아먹는 중이다. 그 뒤로 스키용 리프트가 보이는데, 당연히 운행은 하지 않는다. 덕분에 걸어가는 중이다.

숨 가쁜 70분의 오르막 끝에 정상 Evasion Mont Blanc[링크]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몽블랑이 마치 이웃집처럼 가깝다. 고요한 정상에 우리 둘뿐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 속에서, 침묵하는 거대한 몽블랑은 마치 세상 끝에 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뒤돌아보니 하늘에 걸린 태양이 마치 신비로운 광륜처럼 빛난다. 그네와 우리의 그림자는 거인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서둘러 하산길에 올랐다. 이 오묘한 산행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날의 하이킹이 후일 이탈리아 병원행으로 이어질 줄이야. 쯔쯔가무시 진드기와의 만남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4. 남은 여정을 기다리며
샤모니에서의 첫날밤이 지나갔다. 앞으로의 3박은 더욱 특별한 순간들로 가득할 것이다. 샤모니 도심의 아기자기한 거리를 거닐고, 에귀디미디 케이블카를 타고 하늘 위의 산책을 즐길 예정이다. 날씨의 여신이 미소 짓는다면, 패러글라이딩으로 알프스의 하늘을 날아볼 것이다.
마지막 날에는 QC Terme Chamonix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여독을 풀 생각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눈 앞의 몽블랑을 바라보는 순간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설렌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목적지, 이탈리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5. 혹시라도 RUBIS를 방문할 예정이라면,
만에 하나, 불어를 구사할 수 있고, 차가 있고, 침구류가 있어 이 숙소를 방문할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몇 가지 팁을 주고자 한다.
산장 전체에 공용 와이파이가 하나뿐이다. 그리고 상당히 느리다. 집 주인에게 물어봤을 땐 대체로 빠른 편이라 했는데, 일을 하는 데 지장이 생길 정도로 느렸다. 그래서 ORANGE 4G 모바일 핫스팟을 썼다. 오히려 더 빠르더라. 다만, 통신사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같이 방문하는 동행자 각각 다른 통신사를 개통해 오면 리스크가 줄어들지 않을까 싶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오래된 목조 건물이다. 건물이 4~5층 높이인 데다가, 건물 입구까지 내려가는 계단도 만만찮다. 20kg가 넘는 캐리어 3개를 포함한 엄청난 양의 짐을 가지고 오르내렸는데, 힘 많이 든다. 중요하지 않은 짐은 차에 두는 걸 추천한다.
집주인이 하이킹 코스나 몽블랑 방문 관련하여 상당히 자세한 조언을 해 준다. 통화할 때 기록을 위한 준비를 꼭 해 두자.